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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현동 금도굴 사건 개요

★사건 개요

본 사건은 일제시대 때 (1934-1939) 만든 3만 6천 평 규모의 지하 어뢰 공장(부산 남구 문현동 1219-1)에서 시작됩니다. 이 곳에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부터 중국 본토 등지에서 황금백합작전을 실시하여 은행, 관공서, 고궁, 박물관, 부잣집 등을 닥치는 대로 수탈한 금괴, 다이아몬드, 백금봉, (중국 3대 보물 중 하나인) 비취쌍불, 황금붕상 36좌, 기타 국보급 문화재 등을 잠수함 등으로 수회에 걸쳐 싣고 와 숨겼고, 정충제는 중국 18회, 일본 16회 현장 조사를 다니며 11년 동안 집요하게 추적, 탐사하여 이것들을 최초로 발견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동업자였던 김성태, 백준흠이 정충제에게 “정부에 신고하기 전 어느 정도 빼돌리자”라고 했고 그에 정충제가 동의하지 않자 최초 발견자인 정충제를 살해하려 했고, 사기죄로 고소했으며, 은닉한 금과 보물의 유통이 어려움을 깨닫고는 다른 데서 발견했다는 위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굴단의 배후에 노무현과 문재인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철저히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1934 – 1939 부산 문현동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규모의 일제 시대 지하 어뢰공장 건설

1945. 5-6 중국 본토 전역에서 황금백합작전 자행하여 각종 금은 보화 및 문화재 수탈

1945. 5-6 중국 따렌항에서 잠수함 26척으로 수회에 걸쳐 부산항으로 운송

1992 – 1997 박수웅(박정희 대통령 이발사)과 정충제 등이 본격적 탐사

1999 – 2001 미국 CIA와 정충제 비밀협정으로 지하 어뢰공장 위치와, 은닉된 보물에 대한 정보 확인

2002. 3.2 정충제가 제공한 정보에 입각하여 미 CIA가 주도하여 스탠포드 대학 교수 10명, 현장에 투비. 배제대 토목과 교수 손호웅의 도움으로 굴착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박주탁의 한국 기술교류(주)와 계약하여 지하 16m 수직구를 뚫음. (5단 높이의 황토색 마대에 일본식 한자 ‘이등충’이 찍혀 가득 쌓인 수평 인공 굴 발견)

2002. 3월 말 김성태가 포대 속에 금이 가득 들어 있는데, 국가에 신고하기 전에 100일간만 빼돌리자는 말에 정충제가 반대하자, 김성태 일당이 공모하여 배신하고 정충제의 수직 굴 접근을 폭력으로 막고, 해병대 출신 인부 나현철에게 정충제를 죽이라는 살인 교사를 지시함

2002. 4. 5 김성태, 백준흠, 채상훈, 하진수, 조읍규 등이 서울에서 정충제에게 위해를 가하려 하자, 정충제가 을지로 1가 파출소에 신변 보호를 요청함. (실질적인 반란이 시작됨)

2002. 4월 김성태, 백준흠 등은 나현철에게 다시 한 번 정충제를 죽이라고 지시함

2002. 4. 10경 김성태가 하진수와 보디가드 5-6 명을 대동하고 야간에 정충제 거주하는 산청군 시골집으로 급습, 위해를 가하려 가자 정충제가 경찰에 신고하여 신변보호를 요청함.

2002. 4월 비디오 테이프를 보면서 일본식 한자가 선명하게 박힌 마대포대를 확인하고 시가보다 3배 이상 지불하고 광주에 여자 기공사 김홍랑이 토지를 매입하는 데 성공

2002. 4. 20경 지하 동굴에 “금이 가득 찼다”라는 말이 현장에 돌면서 모두가 기뻐함

2002. 4-6월 대형 양수기 두 대로 지하수를 퍼내는 작업 실시 (7일간)

2002. 4. 28 정충제가 수중 촬영 시도 – 김성태 일당의 방해로 불발

2002. 4-8월 야간을 이용하여 김성태 일당이 도굴. 은닉, 위장 작업을 실시함.

2002. 5. 10 또 다른 최초의 테이프 확인 – 굴 안쪽 깊숙한 곳까지 황토색 (일제 때 국방색) 마대가 수없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음

2002. 5. 13 포세이돈 살베지(주) 설립하여 지분 배분을 함

2002. 5. 14. 15:00경 김대중 대통령 특보(신필균, 여성 담당 비서관), 서울 지방 경찰청 차장 김기영 (치안감) 현장 방문하여 금이 든 포대 확인. 연신 고개 끄덕임.
(1999. 5.3 김대중 대통령 측근인 박종명과 계약한 적이 있음)

2002. 5. 20경 정충제는 수직굴에 대한 “이용 및 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을 부산지방법원에 제기함

2002. 5. 23 채상훈이 사전 탐사 시인 – 엄청난 양의 금이 있음을 확인해줌

2002. 5. 27 지하굴에 있는 포대는 돌이 든 포대라고 전격 발표함. 김성태와 백준흠이 주주 및 임직원 포기를 종용함 (“돌 밖에 없다”고 쇼를 하는 것임)

2002. 6. 12 가처분 신청 건의 재판 있던 날 김성태, 백준흠 등이 나현철에게 정충제를 죽이라고 또다시 구체적으로 지시, 시도했으나 눈치를 챈 정충제가 잽싸게 도망을 쳐 실패함. (이미 금이 아니라 돌이 든 포대라고 5월 27일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정충제를 죽이려고 시도함)

2002. 6. 12 재판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온 일당은 넓은 본 굴을 찾았다고 환호하며 김홍랑이 준비해온 오색 떡을 나눠먹음. 한편, 주주들로부터 지분 포기 각서를 받아냄

2002. 6. 13 정충제를 사기죄로 고발함 – ‘박수웅이 판 굴을 일제 지하 어뢰 공장이라고 속였다’고 고소.

2002. 6. 15 PVC 파이프로 2.5톤 타이탄에 지름 150mm, 길이 4m짜리 30여 개를 싣고 와 잘라서 수직구 속에 넣음 (일당 중 한 명이었던 나현철이 김성태가 싣고 왔다고 확인해줌)

2002. 6. 16경 본 굴을 발견했다고 기뻐한 지 3-4일이 채 넘지 않았는데 넓은 본굴은 없다고 현장 인부들에게 말함. (모두 어처구니 없어 함)

2002. 6-7월 말 검은 양복 입은 건달 7-15명이 매일 밤새 현장 주변을 경호함

2002. 7. 2 동부지청 집단관실에서 가처분 신청 고지판 부착됨

2002. 7. 11 정충제가 장원 스쿠버 동원하여 수중 촬영 시도했으나 김성태 일당의 무력에 의한 폭언/폭력으로 실패 (굴 속에 돌이 든 포대 밖에 없다면 방해할 이유가 없는데도 필사적으로 방해함)

2002. 7월 정충제가 여러 번 현장 확인을 시도했으나 김성태 일당의 필사적인 방해로 실패

2002. 8. 7 정충제가 각 언론에 보도 시작

2002. 8. 7 채상훈이 자신의 170톤급 탐사선인 탐해호를 빚 청산 위해 2001. 7. 1 인천의 김성호에게 팔았었는데 금을 발견한 후 다시 샀음. 비슷한 시기, 김성태도 “갑부”라는 대형식당을 개업함.
2002. 9. 6 본 굴을 발견한 지 6개월이나 지난 이 시점에 처음으로 정충제의 탐사를 막지 않음. 정충제가 다이버를 투입시켜 굴을 조사하게 함. 저들이 굴을 (최대한 어뢰공장처럼 보이지 않도록) 마대자루와 돌 등을 쌓아놓고, 변조시켜 놓은 것을 발견함.
2002. 10. 15 정문균이 금이 없다고 판명난 김홍랑 명의의 땅을 시가의 3배로 매입 (2003. 10. 2 경찰관 등에게 말함)
– 사실은 둘이 짜고 김홍랑이 자신의 지분을 정문균에게 거짓으로 넘김
2002. 9. 6 / 2002. 10 28 촬영 당시에는 쉽게 수직굴 속에 드나들 수 있었고 포대가 여러 종류였음. 20kg용 ‘이타정밀’ 포대에 KS마크가 선명했음.

2003. 10. 2 수평굴 입구가 막혀 들어갈 수 없어서 40분 이상을 소요하여 겨우 들어갔는데 포대는 모두 30kg용 ‘한주 소금’ 포대였음

2003. 10. 27 살인 교사 예비음모 건으로 부산 지방경찰청 대질 심문 날이 다가오자 2003. 9부터 김성태가 나현철을 회유코자 거의 매일 전화하다가 10월부터는 하루 2-3통 이상 시도.

2003. 10. 23 백준흠이 나현철을 회유코자 하루 20여 회 통화 시도함.

2003. 10. 24 나현철 자녀에게도 전화를 걸어 위협하자 나현철이 부산지방경찰청 수사대(최동주)에 상황 보고를 하였고 그 후부터 전화를 걸지 않음

저들이 제주도에서도 다툼이 생긴 동업자를 감금하려 시도하였고, 협박과 위협을 사용해 동업자로부터 포기 각서를 받아냄. 혼자서 굴을 찾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는데, 굴만 찾으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했음.

2003 당시 : 금괴를 은닉, 보관까지는 했으나 유통이 어려움을 깨닫고 어디선가 발굴한 사실로 위장하기 위해 가능성이 있는 곳을 찾는 일에 전력하고 있음.
근거없는 금 10톤 이상이 강남에 나왔는데 시중 가격의 반값 정도의 금액으로 비밀리에 처분 요청되고 있어 뉴시스에서 취재 시작하자 줄행랑. 이 당시 금을 팔려고 했던 자가 김홍랑임.

2005. 9. 16 부산지방경찰청 동부지원지청에 의해 정충제 체포

2006. 2. 6 부산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 선고 (사기죄)

2006. 12. 7 백준흠을 폭행 및 구타하여 부산지방법원 동부 지원에서 1년 추가 선고. 항소심에서 4개월 감형되어 8개월만 추가. (총 36개월+ 8개월 = 44개월)

2009. 5. 10 억울한 징역 44개월 살고 만기 출소

2010. 1. 15 문현동 금도굴 사건을 폭로하는 단행본 ‘황금백합작전’ 출간

2010. 2. 18 두목 백준흠 등으로부터 출판 정지 가처분 및 명예훼손으로 피소

2010. 6월 경 (항쟁우) 위원장 정선태, “내 힘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사건이다. 내 임기 중에는 이 일을 건드릴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음. 이 말은,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는 세력이 문현동을 가로막고 있다는 암시로 해석.

2011. 8. 13 광화문 ‘일제항쟁위’ 사무실 밑에서 관계자 등 500여 명 문현동 유골 1000여 구를 찾아내라는 시위. ‘항쟁위’ 위원장 오봉주, 시위를 주도했던 박계동 전 의원에게 문현동 어뢰공장 찾는 일에 협조하겠다 약속했으나, 이후 불발됨.

2011. 12. 20 정충제 중국으로 도피

2012. 12. 16 정옥자, 문재인 비자금 1조짜리 20장에 대한 양심 선언함
– 어이없이 ‘선거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

2013. 3. 28 도피 16개월 만에 정충제 귀국

2013. 7. 15 시사저널 모 기자는 문재인에게 ‘도굴단의 배후’라는 소책자 분명히 제공. 그에 대해 문재인은 쓰다/달다 아무 언급이 없음.

2013. 7. 22 인민일보 자매지 화구시보에 문현동 사건 기사화
★ 그리고 2018 현재의 상황과, 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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